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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일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화성시무한돌봄서부네트워크팀에서 송준호(38) 사례관리팀장과 그가 사례관리를 맡고 있는 김연자(가명·71) 할머니가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다. 김 할머니는 송 팀장 덕분에 큰 희망을 얻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G뉴스플러스 황진환 |
인터넷검색창에서 ‘어머니’를 검색해 보는 이는 드물다. ‘아버지’를 검색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밥과 잠처럼 그들은 우리의 일상에 본능적으로 녹아들어 있으니까. 가까우면 오히려 멀어지기 마련이다.
한데 기자는 요근래 ‘어머니’를 검색하게 됐다. 8일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화성시무한돌봄서부네트워크팀을 다녀온 뒤다. 그곳에서 올해 칠순을 넘긴 김연자(가명·71) 할머니를 만난 게 계기였다. 30여분의 짦은 인터뷰 도중에 할머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 거는… 그런 말씀 묻지 마세요. 가슴 아프니까…” 잦아드는 목소리로 할머니는 눈물을 삼켰다. 가끔 말은 송곳과 같아서 사람의 폐부 깊숙이 생채기를 남긴다. 그때 기자는 “죄송하다”고 했다, 진심을 담아. 가난한 시대의 파고를 넘어 기적처럼 살아남은 이 시대의 어머니들에게 사죄하고 싶었던가 보다.
어머니는 노인이 됐다. 무덤같은 고요가 일상이 됐다. 가난보다 더 싫은 침묵으로 하루가 시작하고 끝났다. 80여년 전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가 썼듯 ‘노인을 위한 나라‘는 더 이상 없는 것일까. 답은 우리가 노인이 돼봐야 알 것이다.
‘어머니’를 검색하자 블로그, 뉴스, 웹문서가 수두룩히 검색된다. 눈길을 끈 건 故 박재삼 시인이 쓴 ‘추억에서(1961)’다. 배경은 경남 진주다. 마침 김 할머니의 고향도 진주다.
시인의 어머니는 진주 장터 생어물전(生魚物廛)에서 해 다진 어스름까지 생선을 팔아 생계를 잇는다. 어린 시인은 누이와 손 시리게 떨리는 골방에서 돌아올 `울엄매`를 기다린다.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를 갖고 돌아오는 엄마에게 빛 발(發)하는 고기 눈깔들은 은전(銀錢)만큼 손에 안 닿는 한(恨)이다. 김 할머니의 눈물도 가난을 업보로 진 어머니가 흘리는 한(恨)이다.
자식 넷 데리고 진주서 서울로 상경한 젊은시절
김 할머니는 진주 상대리에서 태어나 18살 때까지 중앙동에서 살았다. 이듬해 경남 하동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자신보다 네댓살 많았다. 옛날이라 남편 얼굴도 못 보고 첫날밤을 맞았다.
“신랑이 군대 있음서로 선을 보자니까 군대 있는 몸이라 안 된다 카더라고예. 그때칸만해도 군대는 선도 안 보는 갑따 했지예. 그때만해도 옛날이 돼갔꼬…”
딸 둘, 아들 둘을 낳았다. 남편도 좋았다. “‘등빨’이 좋고 진짜 좋은 분이었다”고 김 할머니는 회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좋은 사람은 술도 좋아한다. 김 할머니의 남편도 술을 너무 좋아한 게 화근이었다. 술 때문에 탈이 난 남편은 할머니 나이 서른에 저세상으로 갔다.
살길이 막막해진 김 할머니는 서울행을 결심한다. 당시 항간에 “애는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馬)은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그 말을 철썩같이 믿어보기로 했다.
“자식 넷을 업고 지고, 옛날 똥차 연기 뿡뿡 나는 거, 그거 타고 서울로 올라왔어예. 아는 사람 하나도 없었지예.”
40여년 전 서울에 첫발을 내딘 김 할머니는 당시 빈촌이었던 미아리극장 근처에 방을 잡았다. 집세가 부족해 사흘동안 폐지를 주워야했다. 힘겹게 집세를 낸 할머니는 다음날 신도림에 있는 직업소개소로 가 식당일을 주선 받았다. 그 뒤 35년 동안 할머니는 식당일이 천직이 됐다. 손에서 물기가 마를 날이 없었다. 자녀들은 물론, 남의 손에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아기들은 어떻게 하시고요?”
“애기들은 인자 큰방(집주인) 할무니한테다가 맡겨놓고… 그런 거는 묻지 마세요. 나 가슴 아파요… 서른둘에 식당생활 했다 아입니꺼. 예순일곱까지 한 거예요. 예순여덟에 병이 나기 전까지. 그런 거를 다 얘기하믄 염 끓어요, 염 끓어… 제 마음이 더운 사람입니더.”
자식들에 관해 할머니는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제가 원체 복이 없는 사람이라. 큰딸 그냥 포도시 밥인가 죽인가 뭐 사는 거이 사는 거 아니에요. 시어른 계시갔꼬.”
둘째딸은 죽었다고 묻지도 말라고 했다. 막내아들은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지금 할머니는 큰아들과 살고 있다. 마흔다섯인 큰아들은 아직 결혼을 못했다. 할머니가 지금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들의 결혼이다.
뇌경색의 아픔…“펄펄 걸어다니다 죽는 게 소원”
또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 원없이 걸어보는 것. “펄펄 한번 걸어댕기다가 죽는 거, 그기 소원입니더.”
할머니는 4년 전 뇌경색 진단을 받고 병원을 전전했다. 7월의 어느날 아침이었다. 혈압약을 먹는데 얼굴이 돌아갔다고 한다. 아들이 큰딸에게 연락했다. 이곳저곳 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다니다가 인하대학교병원에서 뇌병변 판정을 받았다.
꼼짝없이 병원에 1년 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그때까지 해오던 식당일도 그만둬야 했다. 30대 때 아들이 모아놓은 돈은 병원비로 쓰였다. 자식에게 못내 미안했다.
병이 악화되기 전에 징후는 있었다. 식당에서 일할 때 뚝배기를 드는데 힘없이 떨어지더란다. “돈이 뭔지, 병원 가서 미리 검사 받았으면 이렇게까지 안 됐을 텐데.” 할머니는 끌탕을 쳤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김 할머니는 한 쪽 다리를 전다.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거동한다. 왼손도 굽었다. 집안청소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 몸으로 그동안 동인천에 있는 길병원으로 외래진료를 받으러 다녔다. 화성에서 그 먼길을 가는 건 고역이었다.
게다가 할머니는 성미가 급하다고 했다. 집에 있으면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일쑤였다. 답답했다. 청소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다. 아들은 노총각이었고 벌이가 고정적이지 못했다. 집에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사는 낙을 잃었다는 말이 정확했다.
사실 외지사람이었던 할머니는 처음에 화성이란 고장에도 정을 붙이기 어려웠다. 6년 전 처음 서울에서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을 때만 해도 화성하면 연쇄살인사건이 자동으로 따라 붙던 시절이었다.
당시 아들이 서울에서 잘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났다. 아들은 회사를 떠나면서 퇴직금 한푼 받지 못했다. 직장을 세 차례 옮겼는데 옮길 때마다 그랬다. 다행히도 화성시에 사는 아들의 지인을 통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할머니는 아들을 따라 화성시로 내려왔다. 하지만 주위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다보니 할머니 일상은 고적하기 짝이 없었다. “시커먼 사람이 오면 저 사람이 날 죽일랑가 싶었다”는 게 할머니의 그 당시 기억이다.
그런데 이제 할머니는 화성시로 내려온 게 말년의 행복이라고 믿게 됐다. 올 7월 한 사람을 만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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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돌봄’의 또 다른 말은 ‘무한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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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시무한돌봄서부네트워크팀은 몸이 불편한 김 할머니에게 청소봉사서비스, 병원이동서비스, 우울증 해소를 위한 작업장 이용 등의 편의를 제공해왔다. 작업장에서 카드에 스티커 부착 수작업을 하며 할머니는 굽었던 왼손이 많이 펴졌다고 흐뭇해했다. © G뉴스플러스 황진환 |
지난 4월 화성시무한돌봄센터가 화성시 동부출장소에 개소했다. 7월에는 화성시내 3개 권역별 네트워크팀 중 하나인 무한돌봄서부네트워크팀이 송산면 사강리 송산면복지회관에 문을 열었다. 서부네트워크팀은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지회가 위탁 운영을 맡았다.
개소 초기 사강성당 봉가1리 구역장이 한 어르신을 무한돌봄 대상자로 추천했다. 김 할머니였다. 할머니에 대한 사례관리를 담당하게 된 사람은 송준호(38) 사례관리팀장이었다.
“처음 의뢰받은 내용은 할머니가 몸이 불편하셔서 이동하시는 데 힘들어 하신다는 거였어요. 두 번째는 아드님이 지게차 일을 하는데 그게 좀 고정적인 일이 아니잖아요. 중간 중간 힘드셨던 경우가 있던 것 같아요. 직접 할머니랑 상담하다보니 가장 강하게 요청하셨던 게 집안 청소 부분이었고요.”
사실 할머니에 대한 사례관리 중 경제적 지원은 어려운 실정이다. 부양의무자인 아들이 지게차를 할부로 구입했다는 게 족쇄가 됐다. 무한돌봄사업 생계비 지원 요건도 안 됐고, 요양보호서비스 신청도 해봤지만 해당이 안 됐다. 기초생활수급권 신청도 고려했지만 현 상황에서는 어렵다.
일단 할머니의 기본 욕구부터 해결해 드리기로 했다. 송 팀장은 사소한 작은 부분부터 신경을 썼다. 그는 우선 할머니가 원하는 집안 청결을 위해 한 달에 두 차례씩 봉사자들을 보내 청소를 하도록 했다. 할머니가 시력이 안 좋다는 걸 알고는 후원금으로 안경도 맞춰 드렸다. 인천까지 통원치료가 힘든 할머니를 위해 차로 모시고 갔다 다시 태우고 돌아오는 병원이동서비스도 수시로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집에 혼자 계신 할머니의 우울증도 해소하고 운동 효과도 얻을 수 있게 서부네트워크팀 내 작업장에서 카드 포장작업에도 참여토록 했다. 평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동료 두세 명과 카드에 스티커를 부착하는 수작업을 하면서 김 할머니는 불편했던 왼손이 많이 펴졌다고 흐뭇해했다. 할머니의 진짜 흐뭇함은 어쩌면 이웃들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외로움을 떨쳐버렸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김 할머니는 송 팀장에 대해 고마운 사람이라고 거듭 말한다. 이에 대해 송 팀장은 외려 면구스럽다고 손사래를 친다. 많은 것을 해드리지 못했다는 자식 같은 마음에서다. “제가 한 것도 별로 없지만, 작업장 나오시면서 조금 밝아지신 거 같아서 좋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 할머니가 작업장 나오셔서 만날 상담하니까 여러가지 기본적인 욕구는 해결했다 생각이 들고. 아드님 관련해서 방법을 찾아서 해드리면 될 거 같은데 아드님과도 말씀을 나눠봐야할 거 같아요. 지게차 하시되 비수기 때 다른 일 잠깐 하는 거, 그런 걸 일단 여쭤 볼 생각이에요.”
김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했다. 지금 가장 그립거나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예상대로의 답이 돌아왔다. “없어요. 아무도 안 보고 잡고, 그냥 살래예. 좋으신 분, 하루에 이 분(송팀장)이 젤루 보고 싶어. 아무도 안 보고 싶고. 송 팀장 있으니까. 난 송 팀장밖에 없습니더.”
이래서 ‘무한돌봄’의 또 다른 말이 ‘무한신뢰’인가보다. 인터뷰가 끝나자 송 팀장은 할머니를 직접 모셔다 드릴 것이라고 했다. 같이 시장에 가서 장도 보고 전할 말도 있다고 했다. 누가보면 피붙이로 알 것이다.
누군가 나와 같이 가까운 시장에 들러 소소한 찬거리를 사는, 그 정도의 행복이면 족하지 않을까. 그러면 보통 사람들, 더욱이 황혼의 쓸쓸함을 아는 사람들은 이 지독한 하루를 견딜 수 있지 않을까. 그 사람을 기어이 부축하려 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가 쓰러지지 않게 보일 듯 말 듯 옆에 서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사이먼 & 가펑클이 부른 ‘브리짓 오버 트러블드 워터(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공전의 히트를 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는지. 물론, 기자의 억측이겠지만 말이다.







